우리에게 필요한 건, "케데헌 법안"이 아니라 토양을 만드는 일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크게 흥행하면서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죠. ⟨케데헌⟩이 인기를 끌면서 김밥, 라면, 후드티, 매듭, 한옥마을, 남산타워는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뮤지엄샵은 오픈런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하고요. 이렇게 '확장하는'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오늘은 대한상의에서 발행한 보고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저는 위 사진같은 마음이 됐습니다. 몇몇 언론사 기사에서는 "케데헌 법안"이라는 말을 헤드라인에 뽑았더라구요. 이걸 보면서 벌써부터 아득해지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을 보기도 전에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건, 그동안 학습된 것들이 있다는 거겠죠. 법을 만들고, 지원을 하고, 지원을 위해 서류를 만들고, 이 법에 맞춤형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느라 원래 하려고 했던 것에서는 멀어지고... 뭐 이런 그림이요. 그래서 한번 살펴봤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표한 '지식재산권 산업화 방안' 보고서에서는 세계 TOP 50 라이센서 중에서는 한국 기업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에도 ① 스토리 중심의 슈퍼 IP 전략 ② OTT에 대응할 IP 주권 펀드 ③ K산업의 해외 지재권 확보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은 원천 IP 부족, IP의 다각적 활용에 대한 전략 미흡,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투자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뭐 대충 좋은 이야기인가보다 하게 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걸 뜯어보면, 어딘가 물음표가 띄워집니다.
* 미국과 일본 회사 배불리는 한국 IP라는 말
일단 '한국을 이야기하는데 미국과 일본 회사만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실제 수익을 올리는 건 미국의 플랫폼과 일본의 제작사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이것부터 살펴도록 합시다.

2025년 인바운드 관광 수요 예측결과 (출처: 야놀자 리서치)
2025년 1월 야놀자리서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은 코로나 이후 크게 줄었다가 2023년 1,103만명, 2024년 1,668만명으로 코로나 이전 2019년 최고치에 근접하게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에는 1,873만명으로 사상 최대를 전망했는데, 2024년 12월 3일 내란 이후 경제적, 정치적 불확실성 요인에 따라 2천만명 이상도 가능하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는 것 역시 '파생수익'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이 관광객이 찾는 박물관은 물론 SWI가 위치한 성수동 역시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죠. 이들이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고려하는게 먼저입니다.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체험하고 즐기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민이 부족합니다.

파리에서 판매하는 뮤지엄패스. 2/4/6일권으로 나누어 판매한다 (출처=파리 뮤지엄패스 공식 홈페이지)
이를테면 프랑스 파리의 뮤지엄패스처럼 우리나라 박물관들을 투어할 수 있는 입장권을 판매하는 방법도 있겠죠. 수익을 다각화하는 건 여러 방식으로 실험해볼수도 있고, 실제로 콘텐츠의 파급효과는 이렇게 수익으로 환산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을 '체험'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결국 우리의 '부가 수익'으로 잡히게 될 겁니다. 하지만 상공회의소에서는 IP를 통해 벌어들이는 직접수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작사인 소니픽쳐스와 플랫폼인 넷플릭스가 '우리나라 회사'였다면 좋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예로 들어 볼까요. 파리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미국의 거장 우디 앨런의 작품입니다. 출연한 배우들은 거의 다 미국 배우들이고, 스페인과 미국 제작사가 제작을, 배급은 소니픽처스 클래식이 맡았습니다. 제작비 1,700만 달러(한화 약 235억원)로 전세계에서 1억 5,100만 달러(한화 약 2,090억원)을 벌어들였습니다. 거의 10배 남는 장사를 한 거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건 전부 프랑스의 1920년대 문화와 그에 대한 동경, 그리고 벨 에포크에 대한 환상입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 아무런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요?
* IP는 '반드시 성공'하는 게 아니다
일단 '부가수익을 놓칠 수 없다'라는 말의 맥락에서 읽히는 것이 '슈퍼 IP'는 만들면 만들어진다는 착각입니다. 상공회의소 보고서에서는 '스토리 중심의 슈퍼IP 전략'을 이야기하면서 일단 '슈퍼IP가 나왔음'을 전제하고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성공하는 IP를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길러내는 노하우입니다. 그러면서 보고서에서는 '업계 설명'이라면서 "스토리 중심의 슈퍼IP 전략을 입체적으로 지원할 '⟨케데헌⟩법안'이라도 만들어야 될 때"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어권에서 ⟨전지적 독자 시점⟩을 홍보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들. '이건 전독시가 아니다'라는 해시태그가 눈에 띈다. (출처=네이버웹툰 영어 인스타그램)
얼핏 보면 '스토리 중심의 슈퍼IP'를 지원하는 것 같지만, 그 '전략'을 입체적으로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자는 얘깁니다. 아이고. 슈퍼IP를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이미 나올 거라고 가정하고, 일반 IP라도 슈퍼IP로 만들기 위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득해집니다. 이를테면 ⟨전지적 독자 시점⟩의 웹소설과 웹툰은 슈퍼IP가 맞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닙니다. 해외 팬들조차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황인데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콘텐츠는 그저 돈을 쏟아붓는다고 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조업은 투자 시간과 비용 대비 결과가 명확합니다. 그래서 계측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고, 최소한 재고는 자산으로 남습니다. 콘텐츠는 아닙니다. 실패하면 그대로 손해가 발생할수도 있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툰이 주목받았던 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투자자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나 혼자만 레벨업⟩같은 작품 만들기가 그렇게 어렵냐"라는 말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렵다구요.
전략이 있다고 슈퍼IP가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잘 만든 IP가 필요합니다. 잘 만든 IP를 알아볼 수 있는 투자자들의 눈도 중요하죠. 물론 이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 ⟨케데헌⟩역시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지 않나요? 콘텐츠 만드시는 분들 사이에서 한동안 화젯거리는 '⟨케데헌⟩의 시놉시스를 받아들었을 때 나라면 OK사인을 낼 수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잘 만든 콘텐츠를 보고 사후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쉽지만, 만들어내는 건 어렵습니다. 성공하는 IP보다 실패하는 IP가 훨씬 많습니다. 그 유명한 '만신' 데즈카 오사무 역시 발표한 작품 600여종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건 열 손가락에 꼽습니다.
* 펀드,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이 보고서에서 나온 다음 내용은 OTT 플랫폼에 대응할 'IP 주권 펀드 조성'입니다. AI로 인해 알려진 '소버린' 펀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케데헌⟩이나 ⟨오징어 게임⟩, ⟨무빙⟩처럼 글로벌 OTT 오리지널 작품들은 제작비 전액에 일정부분의 수익을 선투자하는 대신, 콘텐츠를 OTT가 소유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파생되는 부가가치가 플랫폼에 귀속되는 문제에 대한 지적은 이전부터 있어왔죠.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 일부 국가에서 이 수익을 제작사에 일부 돌려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렇게만 보면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만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리스크'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투자하는 OTT들은 제작의 리스크를 지고, 일정 부분 수익을 약속하는 대신 작품을 받아가는 방식입니다. 물론, 엄청난 수익이 발생할 경우 창작자/제작자에게 어느정도의 수익을 나눠줄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 마련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을 중심으로 영상 제작자들이 입법청원을 하기도 했고, 황동혁 감독은 당시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에서 저작권료를 지급받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보고서에서 "IP주권 펀드를 조성, 제작사가 일정 지분 이상을 보유한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제작사와 플랫폼이 제작비를 공동 부담하고 IP권리를 공유하게 하는 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IP 조각투자, 일종의 지분투자가 가능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콘텐츠 분야에서는 창작자(아티스트)가 7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면 '독립(Independent, 인디)'으로 분류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냐면, 바로 이게 OTT들이 성공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창작자, 제작자들의 의지대로 작품을 만들게 한다. 그 리스크를 지는 대신, IP에 대한 소유권을 받는다. OTT들이 주목받은 이유가 바로 창작자와 제작자들이 가지는 높은 자유도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국내에서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들의 입김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이 영상 제작자들이 OTT를 찾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케데헌⟩ 역시 리스크를 담보하기 힘들었던 소니가 넷플릭스에 제안, 제작이 확정되기도 했죠.
이 이야기를 빼면, 논의는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콘텐츠 창작자가 키를 쥐고 움직이도록 해야 좋은 콘텐츠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이요. 하지만 보고서의 펀드 조성에서는 '주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창작자와 제작자의 자유도에 대한 언급은 없어서 아쉽습니다. 지식재산권 확보라는 기업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IP를 만드는 방법과 그 투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 펀드가 어디로 갈지 궁금하기보다 걱정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 IP를 자라나게 하는 토양에 투자하라
이런 보고서가 나오는 것은 반길 일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산업화를 위한 방안이 있고, 숫자만 놓여있다면 곤란합니다. IP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작품을 유지하고, 확장하고, 또 다음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순환을 만들어낼지가 중요합니다. 투자를 무한히 할 수 있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투자는 세상에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리스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슈퍼 IP'를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일 겁니다. 이 과정에서 공정하게 수익을 나눌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면, 창작자들이 찾는 플랫폼을 만들어낼 수 있겠죠. 지금은 넷플릭스가 일부 수익을 보전하는 대신 IP를 가져가는 방식이 가장 '해볼만 한' 방식이라면, 수익을 일부 줄이는 대신 리스크도 함께 지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웹툰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방식을 고민해볼 수도 있겠죠.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지에 대해선 모두의 욕망이 충돌합니다. 법안까지 만들어서 국비로 지원하는 방안이 과연 퀄리티를 높일까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원사업의 결과들을 잘 보았지 않나요? 소버린 펀드, 주권 펀드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창작자들이 거기에 매이거나, 지원을 위한 지원이 되면 창작자들의 실력 향상이나 의욕 고취는 어려울 겁니다.
대한상의는 꽤 큰 집단입니다. 여기서 IP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로 읽을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해 오던 대로, 이전의 방식대로 현재의 산업에 투자한다면 이도저도 아닌 결과가 나오고, 진짜 필요한 투자는 못한 채 결과에 대해 니가 잘못했네, 쟤가 잘못했네 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발, 창작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펀드와 리스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지원하는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투자를 한다는 건,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대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갈지, 조각투자를 한다면 어떤 비율로 할 것인지, 창작의 불을 지피고 다음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투자를 한 대신 내가 키를 쥐고 싶어한다거나, 투자를 한 대신 작품의 본질을 해치는 방안을 강제한다거나 하는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면 말이죠.
결과적으로 콘텐츠 분야에서 투자란,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팀워크가 있을 때 작동됩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투자를 하기보단 응원을 하는게 낫습니다. 대충 좋은 말 하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면 필패입니다. 첨예하게 고민할 때 좋은 콘텐츠가 나오듯, 지원과 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증명됐습니다. 어떤 작품, 어떤 창작자에 투자할지 가려낼 안목이 없다면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혹여 실패하더라도 '투자의 리스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작이 필요합니다. 이번 대한상의 보고서를 보고 나니, 토양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쳐서 쓰러지지 않도록, 잘 정돈된 계획이 나오기를 바라게 되네요.